국립공원 여행기

버지니아 북서쪽 쉐난도어 계곡에 있는 시더크릭 벨그로브(Cedar Creek and Belle Grove) 국립역사공원

위기주부 2024. 2.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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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난도어 밸리(Shenandoah Valley)는 존 덴버의 유명한 노랫가사에 등장하는 쉐넌도어 강이 굽이 흐르는 평야지대로,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1965년 영화 <셰넌도어>의 무대이다. 또 그 영화의 주제가로 사용된 작곡자를 알 수 없는 미국민요도 <Oh Shenandoah>인데, 곡명을 클릭해서 가장 잘 알려진 버전인 노르웨이 가수, 시셀 슈사바(Sissel Kyrkjeb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이 단어의 뜻이 "별들의 딸"이라는 낭만적인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인디언 언어로 '전나무 숲의 강' 또는 '높은 산의 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단다.

국립공원청 브로셔의 조감도로 살펴보면 블루리지(Blue Ridge)와 앨러게니(Allegheny) 산맥 사이의 노란색 땅으로 웨스트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및 펜실베니아까지 평원이 이어진다. 그래서 최초로 정착한 서양인들도 1731년 독일계 Jost Hite가 16가족을 끌고 펜실베니아에서 내려왔으며, 비옥한 땅에서 밀농사를 지어서 식민지는 물론 유럽까지 수출을 해서 "Breadbasket"이라는 별명의 곡창지대로 번성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쉐난도어 밸리는 남부의 식량 확보를 위한 요충지라서, 1862~64년 사이에 대규모 전투만 6번이나 벌어진 전쟁터가 되었고, 현재 계곡 전체가 '국가유산지역(National Heritage Area)'에 해당하는 Shenandoah Valley Battlefields National Historic District로 지정이 되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연방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국립 공원으로 2002년에 지정된 곳을 메리스락(Mary's Rock) 겨울 등산 후에 찾아가 보았다.

시더크릭 벨그로브 국립역사공원(Cedar Creek and Belle Grove National Historical Park) 본부라고 된 곳을 찾아왔는데, NPS 로고 외에는 공원 이름도 없고 뭔가 좀 이상했다. 문도 잠겨 있어서 여기가 아닌가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직원이 직접 나와서는 내가 찾는 트레일이 시작되는 곳은 약간 아래쪽으로 걸어가면 된다고 친철히 알려주었다.

(멀리 언덕 위에 해드쿼터 건물과 주차장이 보임) 여기는 6회의 전투들 중 마지막인 1864년 10월 19일 시더크릭 전투(Battle of Cedar Creek)의 최초 교전이 발생한 곳으로, 안내판의 공원 지도를 확대해 보여드리며 간단히 설명한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스트라스버그(Strasburg)에 주둔한 2만명의 남군이 쉐난도어 강의 지류인 시더크릭을 경계로 3만명의 북군과 대치하고 있다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신념으로 남군이 안개낀 새벽에 3방면으로 물을 건너 기습공격을 했는데, 그 사령관은 3개월전 '남군 최후의 도박' 작전을 이끌었던 주발 얼리(Jubal Early)이다. 남군이 불과 몇 시간만에 미들타운(Middletown)까지 밀고 올라가다 잠시 멈춘 사이에, 북쪽 윈체스터(Winchester)에서 내려온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의 본진이 반격에 성공해서 북군의 최종 승리로 끝난 전투로 양측에서 8,6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단다.

당시 준장이었던 필립 셰리든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모자를 쓰고 말에 올라서, 북군의 전열을 정비하는 유명한 그림이다. 그는 이 전투 후에 소장으로, 남북전쟁이 끝난 몇 년 후에 중장으로 진급해서 인디언 전쟁을 지휘하며 "착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다!"라는 말을 처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1883년에 대장으로 진급하며 미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888년에 5성 장군인 원수(General of the Army) 계급을 받은지 2달 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 그의 나이는 고작 57세였다.

작은 연못을 낀 짦은 트레일을 걸어 찾아간 곳은 버몬트 기념비(Vermont Monument)가 있는 곳이다. 나가 싸워서 기습한 적군의 진격을 늦추라는 자살작전에 가까운 명령을 받고, Stephen Thomas 대령이 이끄는 여단 1,500명이 여기서 남군과 싸워서 1,06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30분 정도 시간을 벌어줬단다... 안내판의 그림은 대령이 속한 버몬트 제8연대가 성조기와 군기, 버몬트 주기를 지키기 위해 포위되어서 육탄으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나중에 그린 것으로,

연대원 164명중 1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기수 3명도 모두 전사했지만, 생존자들이 깃발들은 회수해서 퇴각을 했단다. 당시 18세로 여기 지옥같았던 전투에서 살아남아 북쪽으로 돌아간 Herbert Hill 병사가, 그의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서 직접 고향의 버몬트 대리석으로 이 기념비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1885년에 이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공원 본부에서 조금 북쪽에 그들의 주둔지였던 벨그로브(Belle Grove)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이 자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한 남군의 장군인 스티븐 램수(Stephen Ramseur) 추모비가 1920년에 세워졌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1860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지만, 이듬해 바로 남부연맹에 가담해 중령으로 시작해서 단 3년만에 불과 27세의 나이로 소장(Major General) 계급장을 단 인물이다.

소장 임명 후에 찍은 그의 사진으로, 당시 남군 병사들 사이에 퍼졌던 수염은 기르고 머리는 박박 깍는 '삭발투혼'에 동참한 모습이다. 특히 전투 하루 전날에 아내가 첫딸을 낳았다는 편지를 받았고, 북군 포로로 잡혀 죽으면서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단다.

앞서 언급한 이 계곡의 첫번째 이주자 리더의 손자인 Issac Hite Jr.가 1797년에 완공한 대저택이 오른쪽에 보이는 벨그로브 플랜테이션(Belle Grove Plantation)으로, 그의 아내 Nelly는 나중에 미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의 여동생이었다.

국립역사공원에 속하지만 기존의 재단에서 계속 소유 및 운영을 하고 있는데, 커다란 빨간 헛간의 1층에 새로 단장을 했다는 비지터센터와 기념품 가게는 겨울철에는 주말에만 문을 연다고 해서 들어가 볼 수 없었고, 트레일 표시를 따라 도로 건너편으로 가봤다.

발굴을 토대로 노예들이 살았던 당시의 모습을 건너편의 안내판에 재현해 놓았는데, 이 대농장의 전성기 때는 농장주가 300명 가까운 흑인 노예를 소유했을거라 한다.

노예들의 통나무집과 대비되는 으리으리한 벨그로브 저택은 버지니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18세기 플랜테이션 건물들 중의 하나로, 여름철에 진행되는 유료투어로 내부 구경도 가능하단다.

다시 11번 국도 Valley Pike로 돌아나와 조금 올라가면, 민간 재단인 Cedar Creek Battlefield Foundation 안내소 겸 박물관이 나오는데 역시 문을 닫았다. 이 단체에서 매년 10월에 회원 및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조금 전 벨그로브 앞마당에서 남북전쟁 당시의 모습을 재현(reenactments)하는 행사가 아주 유명한 모양이다.

위기주부가 미국의 다양한 국립 공원들 비지터센터를 100곳은 가본 듯 한데, 이렇게 시내 쇼핑몰 건물에 미용실, 방송국, 가구점과 함께 입주해 있는 곳은 처음 봤다.^^ 자동차 뒤의 나지막한 단층 건물의 2/5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간판 크기로도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역시 미들타운 시내의 이 곳도 겨울철은 주말에만 오픈한단다. 이상으로 또 하나의 '별 볼일 없는' NPS 오피셜유닛 방문을 마쳤는데, 남북전쟁 유적지에 와서 대포 하나 구경을 못 한게 좀 아쉬워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옛날에 이미 소개한 다른 전쟁터의 못 가본 구역을 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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