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 아들의 이름을 '완용'으로 짓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다. 특히 성이 이(李)씨라면 정말로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와 같이 미국에도 나라의 배신자이자 반역자의 상징(icon)인 인물이 있는데, 미국 독립전쟁 전반기의 가장 중요한 승리로 평가받는 1777년 새러토가 전투의 부사령관이었던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이다. 위기주부의 2박3일 북부 뉴욕주 여행기 시리즈 전편에 언급했던 심리전술로 스탠윅스 요새의 포위를 무너뜨린 구원군 지휘관이 바로 그였는데,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돌로 조각된 그의 신발을 직접 보기 위함이었다.

둘쨋날도 해 뜨기 전에 차에 시동을 걸고, 단 10분 거리의 첫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작년의 1박2일 오하이오주 솔로 여행에서는 그냥 저렴한 모텔을 이용해서 불편함이 좀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모님의 윤허를 받아 기한이 얼마 남지않은 하얏트 숙박권을 혼자 쓰는 사치를 부려서, 아주 넓고 편안한 밤을 보내고 또 따뜻한 아침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진입로에 잠시 차를 세우고 1938년에 설립된 사라토가 국립역사공원(Saratoga National Historical Park) 간판을 찍었는데, 제일 왼편의 돌 하나가 색깔이 다른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이... 본인도 약간의 OCD(Obsessive-Compulsive Disorder, 강박장애)가 있는 모양이다~

살짝 절정을 지난 가을 단풍의 주차장에는 의외로 먼저 온 차가 두세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블로워로 낙엽을 치우고 있던 계약직원(?)이 타고 온 것이었다. 안내판 옆에 공원 브로셔도 남아 있어서 기분좋게 하나를 챙기고는, 가운데 보이는 계단을 이용해서 비지터센터 쪽으로 일단 올라갔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거기서는 막 떠오른 햇님과 '태양을 향해 쏴라'를 시전하는 대포를 피사체로 작품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잠시 헷갈렸는데 유명한 추억의 서부영화 제목은 <내일을 향해 쏴라>구나...ㅎㅎ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는 사라토가 국립역사공원 비지터센터의 모습이고, 이 곳의 방문기는 두 편으로 작성될 예정으로 순서가 좀 바뀐 감은 있지만, 전투의 전체적인 상황과 그 결과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2부에 설명할 예정이고, 본편에서는 한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파란 하늘이 비친 비지터센터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니, 안내판에 그림자가 비춰서 잠깐 비싼 인형들이라 생각했지만 그냥 판대기 사진을 세워둔 것이었다. 제일 오른편에 얼굴을 검게 칠한 인디언 전사가 보이는데, 당시 대표적인 6개의 인디언 부족국들 다수는 영국편을 들었고 일부는 식민지 반란군에 합류했으며, 또 같은 부족내에서도 의견이 갈려서 내분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단다.

공원의 지도로 일방통행 순환도로를 따라서 운전하며, 9월과 10월의 두 번의 전투 경과를 번호 순서대로 놓여진 안내판 등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많은 기념물들도 함께 구경할 수 있다. 지도에 씌여진 이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미 블로그에 등장했던 인물이 한 명 있는데 ②번 부근의 코시치우슈코(Kosciuszko)로 여기를 클릭해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의 국립기념관 방문기를 보실 수 있다. 비지터센터는 폐쇄되었지만 도로를 따라 둘러볼 계획을 가지고 주차장으로 돌아가 진입구로 씩씩하게 차를 몰고 갔는데...

게이트가 아직 닫혀 있었다! 연방정부 셧다운 안내문이 붙어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야외전시를 볼 수 있는 공원 도로는 개방을 하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열어줄 사람이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고 해서 잠깐 고민을 하다가, 브로셔 지도를 보니까 이 공원에서 꼭 직접 보고싶은 '신발 기념물'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 다시 주차를 하고 비지터센터 계단을 또 올라갔다. 헉헉~

그 길의 이름은 윌킨슨 트레일로 특이하게도 1777년 존 버고인(John Burgoyne) 소장이 이끄는 영국 침공군의 지도제작자였던 윌리엄 윌킨슨(William Wilkinson) 중위를 기리는 것이란다. 그가 만들었던 이 지역의 상세한 지도를 바탕으로 당시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위치 등의 확인이 가능했기에 특별히 '적군'의 이름이 국립역사공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가을 아침이슬에 신발을 적시며 신발 기념물을 찾아간다~ 첫번째 전투는 9월 19일에 영국군이 3개 방면으로 나눠서 ③번 베미스 고지(Bemus Heights)에 주둔한 대륙군을 포위하기 위해 진군하며 시작되었다. 직전에 새로 부임한 북부 대륙군 사령관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소장은 요새에서 버티기로 결정하지만, 부사령관 아놀드 준장이 포위되기 전에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마지못해 허락한다. 저격수 부대와 함께 직접 나가서 싸운 아놀드의 활약으로 포위 작전은 실패하고, 비록 영국군이 ⑥번 프리먼 농장(Freeman's Farm)을 점령했지만 사상자 수는 영국이 590명, 미국이 320명으로 영국측의 피해가 더 컸다.

10여분을 걸으니 대포들과 함께 안내판이 하나 나왔는데, 영국측에서 싸웠던 독일 용병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흥미있는 사실은 우측의 그림으로 약 100명 이상의 독일인 아내와 자녀들이 같이 대서양을 건너와서 저런 모습으로 전쟁터를 따라 다녔다 한다. 1차 전투 후에 게이츠가 보고서를 의회에 보내면서 나가서 싸운 자신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놀드가 항의하면서 둘 사이의 불화가 폭발했고, 결국 게이츠는 아놀드의 부사령관 지휘권을 박탈하고 막사에 감금을 시키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 두 개의 안내판과 하나의 작은 책상(?) 그리고 펜스로 보호된 석조 기념물을 찾았다. 민병대의 합류로 대륙군의 수는 계속 늘어났지만 영국군은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후퇴와 진군을 놓고 고민하던 버고인이 다시 공격을 명령하면서 10월 7일에 2차 전투가 벌어진다. 아놀드는 총소리를 듣고 막사에서 나와 직접 선두에서 병사들을 지휘했지만, 게이츠는 전투 내내 안전한 숙소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단다.

이번에도 사기가 오른 대륙군이 영국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퇴각하는 영국군을 선봉에서 추격하던 아놀드는 이 자리 근처에서 왼쪽 발에 총을 맞았는데 말이 쓰러지면서 깔리는 바람에 다리가 완전히 부서졌단다! 그 상태에서도 아놀드가 부하들을 지휘하는 모습으로 공원 브로셔의 표지로 사용된 그림이다. 그는 새러토가 전투에서의 무공으로 얼마 후에 소장으로 진급은 되지만, 부러진 다리가 잘못 붙어서 왼발이 5 cm나 짧아져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겨우 걸을 수 있었고, 그래서 다시 야전 사령관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듬해 1778년에 필라델피아 군정장관에 취임하지만 부정부패 혐의로 군법재판에 수 차례 회부되자 그는 영국군과 내통을 시작하고, 1780년에 웨스트포인트 사령관이 된 후에 요새를 영국군에 넘기려다가 발각되어서 당시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뉴욕으로 도망쳐 영국군에 합류한다. 이러한 아놀드의 배신을 부추긴 것이 오른편에 그려진 1779년 4월에 재혼한 두번째 아내로, 식민지 독립에 반대하고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였던 필라델피아 대법원장의 딸인데, 결혼 당시에 아놀드는 38세였고 아내는 20살이나 어린 18세였단다.

웬 책상을 가져다 놓았는지 의아했는데, 시각장애인이 어떤 형상의 조각인지 만져서 확인할 수 있도록 축소 모형을 올려다 놓은 것으로, 실제 크기도 가늠할 수 있도록 별도로 축척도 길이와 함께 점자로 표기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2부에서 보여드릴 예정인 새러토가 전투 기념비를 19세기말에 건립하면서, 승전의 주인공인 베네딕트 아놀드가 부상당한 장소에 간단한 표식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위원들이 찬성을 했단다. 하지만 일부는 그 이상의 경의를 표하고 싶었고, 그렇다고 독립전쟁 중에 반역한 군인의 동상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전투에서 희생된 그의 왼쪽 발만 기념하기로 결정해서, 대리석으로 기병용 승마 부츠를 조각한 부트 모뉴먼트(Boot Monument)가 1887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높이 1.2 m의 석판에 월계관이 씌워진 원통형의 포신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거기에 소장(Major General)을 상징하는 두 개의 별이 달린 견장으로 장식된 부츠가 매달려 있다. 자세히 보면 대포가 땅을 향해 거꾸로 조각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불명예의 표시라 한다. 또 구두의 앞부분만 돌이 다른 이유는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기 전에 누가 망치로 훼손을 했던 것을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뒷면을 보면 설립을 주도한 사람의 이름이 위쪽에 있고, 아래쪽에 비문이 있는데 그를 '대륙군의 가장 뛰어난 군인(the most brilliant soldier of the Continental Army)'으로 칭할 뿐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그래서 이 신발 기념비는 미국에서 베네딕트 아놀드에게 바쳐진 유일한 기념물인 동시에 국립 공원에서 헌정된 인물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단 하나의 기념물이라 한다.

그는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군 준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망명한 아내와 함께 전후 1782년에 영국으로 가서 잠시 사교계에 나가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비난과 놀림의 대상이 되다가 1801년에 사망하고 런던 근처의 교회에 묻혔다. 일설에 의하면 아놀드가 여기 전투중에 말에서 떨어진 것을 본 부관이 달려와 다친 곳이 있냐고 물었을 때, 씁쓸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 다리에 맞았다. 차라리 심장에 맞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가운데 멀리 보이는 비지터센터로 돌아가는 길은 왼편이라고 알려주는 그림자 독사진 마지막으로 보여드리며 1부를 마친다. 21세기 미국에서도 여전히 'Benedict Arnold'란 이름은 (한국의 이완용처럼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최근의 역사학계는 그의 배신이 탐욕이나 사익을 추구했다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 좌절감 등의 요인이 컸다고 보며, 그래서 그를 복잡한 동기를 가진 영웅이자 비극적인 인물로 재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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