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 버지니아로 이사와서 국립공원청이 직접 관리하는 주변의 공원들을 빠짐없이 다녀보니, 노예해방 직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흑인을 기리는 곳들이 많다는게 눈에 띄었다. 방문 순서대로 적어보면 Carter Woodson, Mary Bethune, Frederick Douglass, Maggie Walker, Booker Washington, Harriet Tubman, Paul Dunbar 등으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꼭 붙는 수식어는 '흑인최초'이다. 물론 그 시대의 흑백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쯤되면 유사한 업적의 백인들은 받지 못하는 국가적 명예를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챙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했다.
오하이오 주 1박2일 여행을 계획하며 처음 알게된, 그 시대의 또 다른 흑인 선구자를 기리는 준국립공원인 찰스영 버팔로솔져 내셔널모뉴먼트(Charles Young Buffalo Soldiers National Monument)를 찾아왔다.
주정부에서 따로 만든 안내 표지판의 옆으로 보이는 도로는, 흑백요리사 준우승자인 에드워드 리가 사는 도시로 한국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켄터키 루이빌(Louisville)에서 시작해, 신시내티와 콜럼버스를 차례로 지나며 대각선으로 오하이오를 완전히 관통해 북동쪽의 클리블랜드까지 이어지는 42번 국도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앞마당에는 찰스영 대령(Colonel Charles Young)의 집이 1974년에 국가역사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는 동판이 있는데, 1864년에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세번째 흑인으로, 여기 윌버포스(Wilberforce) 대학교의 교수이며 흑인 최초의 군사 무관이자 국립공원 감독관, 그리고 1922년에 사망할 때까지 미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흑인이었다는 간단한 이력이 적혀있다.
국도변에 좌우로 다른 주택들은 전혀 없는 곳에 이 커다란 집만 너무 깔끔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는데, 아주 최근에 내외부 리노베이션을 마쳤기 때문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니까 예상치 못한 방문에도 불구하고, 흑인 레인저가 반갑게 맞아주며 2층의 극장에서 안내영화를 틀어주었는데 공원 홈페이지에서도 바로 보실 수 있다.
영은 노예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가 남북전쟁에 참전하며 가족은 자유인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음악과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지역 고등학교의 유일한 흑인 졸업생이었다. 1883년에 오하이오 주에서 치러진 웨스트포인트 입학시험의 응시자 26명중에 2등의 성적을 받았고, 1등이 지원을 포기한 후에 연방 하원의원의 추천서를 받아서 이듬해 미육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된다.
육사에서 급우와 교관들에게 극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았는데, 맨 아래 사진에서 2열의 뒤로 빠져 서있는 사람이 찰스 영 생도(cadet)이다. 그는 19세기에 육사에 입학했던 9명의 흑인들 중 하나로, 1학년 때 수학에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동기보다 늦은 1889년에 졸업을 해서 3번째이자 마지막 흑인 졸업생이다. (그리고는 거의 반세기가 흘러 1936년에야 4번째 흑인 졸업생이 나옴) 첫번째 졸업생은 인종차별주의 상관의 모함으로 불명예 전역, 두번째는 소위로 재직중 병사했기 때문에, 이 후 영은 진급할 때마다 군대 내 흑인최초의 기록을 매번 갈아치우게 된다.
버팔로 솔저(Buffalo Soldier)는 흑인 군인을 말하는 것으로, 1870년대 인디언이 흑인들의 외모가 버팔로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 굳어졌다. 찰스 영은 당연히 이러한 흑인 부대의 지휘관으로만 계속 배치되었고, 중간에 윌버포스 대학교의 교수와 해외 여러나라의 무관 등을 거쳐서 1917년에 대령까지 진급한다. 문제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그도 자신의 파견을 요청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다수의 백인 장교들이 그의 지휘하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미군은 그에게 별을 달아 유럽으로 보내는 대신에 지병을 이유로 강제로 전역을 시키는 해결 방법을 택한다...
이듬해 복직 신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라이베리아 군사 무관으로 발령을 내서 아프리카로 보내졌고, 찰스 영 대령은 나이지리아에서 임무 수행중 병을 얻어 1922년에 라고스에서 57세로 사망했다. 아내와 다른 흑인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1년 후에 유해가 발굴되어 미국으로 돌아왔고, 알링턴 국립묘지 원형극장에서 군사 장례식이 치러지고 거기에 묻혀있다. 이러한 그의 생애에 이어서 유산을 보여주는 설명판들이 나오는데, 위의 가운데 보이는 흑인이 앞서 언급한 육사 4번째 졸업생 Benjamin O. Davis Jr.로 육군 항공대를 거쳐서 공군 중장으로 1970년까지 복무했고 1998년에 예비역 대장 계급을 받았다. 이외에도 우리 세대가 아는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 및 대통령의 얼굴까지 계속 등장을 했다~
특히 위기주부의 눈길을 끄는 이력으로 1903년에 찰스 영은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책임자(superintendent)로 발령을 받아서, 도로건설 등에서 직전의 3년을 합친 것보다 많은 진척을 보여주는 등 훌륭하게 관리했으며, 이를 기념해서 2004년에 그의 이름을 붙인 세쿼이아 나무가 사진에 보인다. 이상과 같이 10장도 안 되는 분량으로 포스팅을 끝내기는 좀 아쉬운 듯해서, 글을 쓰며 찾아본 사진을 가져와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면...
그가 아쉽게 객사하고 정확히 1백년이 흐른 후에 당시 인종차별로 진급의 장벽이 있었던 점이 인정되어, 2022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그에게 준장 계급이 추서되어 조카 손녀가 대신 별이 달린 계급장을 받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난 2024년 여름에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그를 기리는 나무의 이름판을 지정 20주년을 맞아 교체하는 행사가 열렸을 때의 사진으로, 찰스 영 준장(Brigadier General Charles Young) 나무는 크레센트 메도우(Crescent Meadow)로 들어가는 도로의 다른 유명한 오토로그(Auto Log) 부근에 서있다고 한다. "아~ 그리운 세쿼이아 국립공원..."
글의 첫머리에 찰스 영과 동시대 흑인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이 흑인이라서 국립공원청에서 특별히 더 챙겨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고 했지만, 이 글을 마치며 내리는 결론은... 그 사람들 모두는 21세기의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성취를 이룬 위대한 '인간'들이라서 그러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고, 단지 그들의 피부색이 검었기 때문에 흑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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