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주부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참여한 클럽 활동이 있다면 대학 때 공대 테니스부를 한 것이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수 년 동안 열심히 활동했었는데, 피트 샘프러스와 안드레 애거시, 그리고 동양 선수들의 우상인 마이클 창이 테니스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한국 직장에서도 아주 가끔 동료들과 게임을 하기도 했고, 미국 와서도 잠시 동네 테니스센터에서 레슨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그리고 노박 조코비치 등의 하이라이트를 잠깐씩 보는게 전부였고, 그나마 이 3인방 중에서 앞의 둘은 최근에 은퇴를 했다.

금요일 오전에 집에서 차로 출발해 맨하탄에 도착해서, 딸의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둘이 함께 지하철 퍼플라인으로 갈아타고 뉴욕 퀸스로 향하는데, 구식 전광판에 이 차량이 플러싱메도우(Flushing Meadows) 공원 내에 있는 미테니스협회 빌리진킹 국립 테니스센터(USTA Billie Jean King National Tennis Center)로 향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종점 직전의 Mets-Willets Point 역에 내리면 바로 북쪽은 시티필드 야구장이고, 이렇게 고가보도로 전철 차량기지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면 테니스센터가 나온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날은 뉴욕메츠의 홈경기도 있는 날이라 우리와는 반대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차량기지를 가운데 두고 별도 노선의 롱아일랜드 기차역이 뉴욕시 전철역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가 들어와 있는 플랫폼 너머의 갈색 건물이 14,000명을 수용하는 루이 암스트롱 스타디움(Louis Armstrong Stadium)으로, 1971년 사망할 때까지 공원 바로 옆의 코로나 지역에 살았던 바로 그 유명한 재즈 음악가의 이름을 딴 것이고, 우리가 티켓을 구입한 주경기장은 그 뒤쪽 옆으로 보인다.

30여년전에 테니스부를 하면서 영국 윔블던, 프랑스 롤랑가로스, 미국 플러싱메도우 등에서 열리는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세계 탑랭킹의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직접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저리로 들어가면서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이다! ㅎㅎ

보안검색과 표검사를 통과해서 들어오니까, 제일 먼저 오른편으로 대진표들이 눈에 띄었다. 사진은 남자단식 본선 128명의 대진표로 좌측 제일 위에 현재 세계 랭킹 1위로 1번 시드를 받은 야닉 시너(Jannik Sinner), 우측 제일 아래에 2번 시드의 카를로스 알카라즈(Carlos Alcaraz) 이름이 있다. 그리고 우측 제일 위에 38세의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가 보이는데, 저녁 7시에 우리가 보는게 바로 그의 3라운드 경기이다.

정면에 보이는 우리 경기장을 찾아 걸어가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미니스커트에 와인잔을 든 금발의 여성이 US오픈(US Open) 테니스 대회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테니스를 거의 모르는 딸도 US오픈에 대해서 딱 하나는 알고 있었는데, 바로 사진의 가게에서 팔고 있는 허니듀스(Honey Deuce)였다. 하지만 여기는 줄이 너무 길어 그냥 지나쳤기 때문에, 그게 뭔지는 좀 있다가 다시 알려드린다~

메인 테니스코트로 1997년에 개장한 아서 애시 스타디움(Arthur Ashe Stadium)은 프로 선수들에게도 최초로 개방된 1968년 US오픈의 단식에서 우승한 미국의 남자 흑인 선수의 이름을 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손에 뭔가를 들고 마시고 있어서 우리도 입구옆 다른 가게의 긴 줄에 잠시 섰다가, 직원이 경기장 안에서도 판다고 해서 일단 바로 입장을 했다.

꼭대기 관중석으로 올라가는데 마지막 계단에도 '그것'을 구입하려는 줄이 만들어져 있어서 기다리며 찍은 사진이다. 오른편으로 멀리 보이는 지구본 유니스피어(Unisphere)는 이 공원부지에서 개최되었던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의 상징 기념물로, 명작 SF영화인 1997년 <Men In Black>의 마지막 부분에서 외계인 우주선에 부딪혀 부서지는 장면이 나왔었다.

짜잔~ 안내판 사진에 보이는 허니듀스는 그레이구스 보드카에서 2006년 US오픈에 처음 선보인 칵테일로, 지금은 대회 자체를 상징하는 시그니쳐 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즉, 이 잔을 들고 사진을 찍어야만 대회를 직관했다는 인증샷으로 인정을 받는다고나 할까? 한 잔의 판매가격은 작년과 동일하게 세금포함 23불이며,

연녹색의 허니듀(honeydew) 멜론을 동그랗게 깍아서 노란 테니스공처럼 보이게 만든 것 3알을 장식으로 올려주는데, 그 과일 이름과 테니스 용어 듀스(deuce)를 합쳐서 작명을 한 것이다. 이 칵테일이 얼마나 인기가 있냐면 작년 2주간의 대회기간에 정확히 556,782잔이 판매되어서 단일 품목으로만 무려 1,300만불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부녀도 한 잔씩 들고 경기장 좌석에서 함께 인증샷을 찍었다.^^

허니듀스 칵테일만 찍어서 페북에도 바로 올렸었는데, 아크릴로 만든 튼튼한 컵은 기념품으로 당연히 집에 가져갈 수 있다. 다행히 시간도 딱 맞아떨어져서 잠시 후에 장내방송이 시작되고 선수들이 입장을 했다.

작은 폭죽과 함께 조코비치가 입장을 하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다. "내가 저 유명한 테니스 선수를 직접 보다니! 그런데, 좀 멀기는 하다..."

조명이 다 들어오고 두 선수가 가볍게 몸을 푸는 모습으로, 흰옷의 상대 선수는 세계 랭킹 43위의 카메론 노리(Cameron Norrie)이다.

아서애시 경기장은 세계최대 관람석의 테니스코트로 23,000명 이상을 수용하는데, 이 날 90% 이상의 티켓이 팔렸다지만 경기 초반에는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그리고 이 경기장은 원래는 지붕이 없었지만 2008년부터 5년을 연달아 남자 결승전이 비로 지연되는 일이 발생하자, 이듬해 개폐식 지붕을 만들기로 해서 2016년에 추가가 된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처음에는 이렇게 핸드폰 10배 줌으로 조코비치의 사진을 좀 찍어보려다 그냥 관두고, 딸에게 테니스 룰을 설명해주며 경기 직관에 집중했다. 노리가 2세트만 타이브레이크 끝에 가져갔고 조코비치가 1세트와 3세트를 이겨서, 세트스코어 2:1에서 4세트가 진행되었고,

조코비치가 매치포인트에서 퍼스트서브를 넣는 순간으로, 폴트 후에 이어진 세컨서브 랠리에서 경기를 끝내서, 세트스코어 3:1로 조코비치가 예상대로 승리해 16강에 진출을 했다.

상대 선수 및 심판과 악수를 하고 관중들을 향해 만세를 부른 다음에, 라켓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시늉을 하는 모습으로, 작년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는 딸을 위해 계속 해오고 있는 세레모니다. (화요일 8강전 승리 후에는 딸의 8살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딸이 좋아하는 '케데헌'의 소다팝 댄스를 짧게 보여주기도 했음)

경기후 인터뷰를 하는 조코비치의 얼굴이 전광판에 나오고 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그리고 다른 경기에서도 승자가 모두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미리 준비된 사인볼을 관중석으로 날려주고 있는 모습으로, 에미레이트 항공사 후원이라서 뒤쪽에 승무원 복장을 한 여성이 서있는게 보인다.

마지막으로 경기 내내 커다란 테니스공 기념품을 들고 코트 바로 옆에 줄지어 앉아 있어서 눈에 띄던 아이들에게 다가가 직접 사인을 해주고 퇴장을 했는데... 이 날 경기의 코트사이드 구역의 가격은 한 자리에 대략 2,000달러 정도 했었다!

그런데 끝난게 아니라 여자 단식경기가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코트 청소를 하는 모습으로, 하드코트는 저렇게 블로워로 한 번 불어주면 끝이겠지만, 테니스부에서 클레이코트를 손질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어떤이의 꿈>을 부르며 커다란 솔로 바닥을 고르고, 물을 살짝 뿌린 후에 라인을 깨끗하게 새로 그릴 때의 상쾌함! 그렇게 매주 1,2학년이 코트를 준비해놓으면 3,4학년과 대학원생 선배들이 주로 쳤지만...^^

자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니까 여자 경기도 앞쪽만 일단 조금 보기로 했는데, 코트 정리가 끝나고 조명이 꺼지더니 갑자기 무슨 나이트클럽 분위기로 바뀌었다.
현란한 조명과 음악이 나오는 모습을 짧은 세로 영상으로 찍었는데, 자세히 보시면 코트 면의 사각형들에 딱 맞게 프로젝터를 쏴서 색깔이 바뀌는게 신기했다. 이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자 선수들이 입장을 하는 것이 무슨 쇼를 보는 느낌도 들었다.

하늘색 옷이 18살의 러시아 선수 미라 안드레바(Mirra Andreeva)로 5번 시드의 강자이고, 맞은편의 29살의 미국 선수 테일러 타운센드(Taylor Townsend)로 단식 랭킹은 143위에 불과했다. 즉,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이라서 시작 전부터 관중석에서 "USA"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몸을 푸는 모습인데, 관람객들의 절반 정도는 이미 자리를 뜬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포함해서 남은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에 힙입어 타운센드가 게임스코어 7:5로 1세트를 따냈다.

경기 중에 폭죽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시티필드에서 메츠가 이기면서 야구가 끝났는지 불꽃놀이를 아주 길게 했다. 우리 좌석이 위쪽이라 더 추운 것 같기도 해서 아래쪽 빈칸으로 자리를 옮겨서 2세트도 일단 보기로 하고 내려갔는데,

미국 선수가 초반에 살짝 밀리는 느낌이 들어서, 이러다 세트스코어 1:1이 되면 3세트까지 계속 봐야될 것 같아 그만 일어서기로 했는데, 그 때가 밤 11시반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나간 다음에 분위기가 급반전되어서, 타운센드가 2세트도 쉽게 따내서 2:0으로 이겼음)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이라던가 '버킷리스트'라는 표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고, 그냥 까마득한 젊은 시절의 잊혀졌던 꿈을 이루고는 다시 전철을 타고 맨하탄 딸의 아파트로 돌아가니까 새벽 1시였다. 언제 시간이 되면 지하실 창고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테니스 라켓을 꺼내서, 동네 공원에 혼자 벽치기라도 한 번 하러 가야겠다~
PS. 2025년 US오픈 테니스 남자 단식은 9월 5일 금요일에 조코비치 vs. 알카라즈, 그리고 시너 vs. 오제-알리아심 준결승전이 열리고, 승자가 7일 일요일 오후 2시에 맞붙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혹시 직접 보러가실 분이 계실까봐 알려드리면... 결승전 티켓은 우리가 앉았던 제일 꼭대기 좌석이 현재 900불 내외이고, 코트사이드 좌석은 최소 13,000불 정도부터 시작합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