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여행기

남북전쟁 격전지들이 모여있는 프레더릭버그/스팟실베니아(Fredericksburg & Spotsylvania) 국립군사공원

위기주부 2023. 8.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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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당시에 남부연합의 수도는 지금 버지니아의 주도인 리치먼드(Richmond)로 북군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불과 약 100마일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따라서 약 4년의 전쟁기간 동안에 두 도시의 중간쯤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음은 자명한 일이고, 그러한 격전지 4곳을 묶어 그 장소들이 속한 두 카운티의 이름을 따서 프레데릭스버그 스폿실베이니아 국립군사공원(Fredericksburg and Spotsylvania National Military Park)이라는 긴 이름으로 국립공원청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 95번 고속도로와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가장 먼저 전투가 벌어진 프레데릭스버그 전쟁터(Fredericksburg Battlefield)의 비지터센터를 찾아왔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아래 공원지도에서 ①번으로 표시한 곳으로 1862년 12월에 남군의 Lee와 Jackson이 북군의 Burnside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곳이다.

나머지 3곳도 간단히 설명드리면 ②번 챈슬러스빌(Chancellorsville)에서도 1863년 5월에 남군의 Lee와 Jackson이 북군의 Hooker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북진을 했지만, 같은 해 7월의 게티스버그(Gettysburg) 전투에서 패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듬해 1864년 5월에 ③번 윌더니스(Wilderness)에서 Lee가 북군 총사령관 Grant와 처음으로 맞붙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바로 장소를 ④번 스폿실베이니아(Spotsylvania)로 옮겨서 격전을 치렀는데, 이렇게 4곳의 전쟁터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는 남북 합쳐서 10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추가로 지도의 우측 아래에 'Stonewall Jackson Shrine'이란 곳이 있는데, 남군의 맹장인 잭슨(Jackson)이 챈슬러빌 전투에서 어이없는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중상을 입은 후에 후방으로 호송되다가 사망한 장소를 기리는 곳이다. 그가 어떻게 '스톤월(Stonewall)'이라는 전설적인 별명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해서 작년 4월에 방문했던 다른 전쟁터 이야기를 보시면 된다.

주차된 차들에 비해서 비지터센터 안에 사람이 적어서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직원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가이드투어가 출발을 했으니 바로 나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거라고 했다.

위기주부는 셀프투어로 충분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전시실들을 구경했는데, 금색 액자에 들어있는 프레더릭스버그 전투를 묘사한 이 작품은 국립 공원 브로셔에도 커다랗게 인쇄가 되어 있다.

비지터센터를 나오면 다른 건물이 별도로 또 만들어져 있는데, 이 공원이 만들어진 1930년대의 버지니아는 흑백분리가 당연시 되던 시절이라, 흑인 전용의 안내소와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라는 설명이 안내판에 적혀 있다.

전투 당시에 남군의 방어선이었던 돌담을 복원해놓은 것이고, 그 옆 Sunken Road를 따라 멀리 가이드투어 일행이 보였다.

잠깐 귀동냥을 해보니 양측의 병력과 전술 등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 같아서, 어차피 그런 건 복습으로 가능하지만 블로그 방문자들의 흥미도 없으실 것 같고... 그냥 남아있는 건물과 기념물들 위주의 소소한 이야기로 끌어가보려 한다~

격렬한 전투의 한가운데 있던 이니스 하우스(Innis House)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전쟁이 끝나고 외부는 좀 수리를 했지만, 내부는 당시 총탄의 흔적이 안내판의 사진처럼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뛰어난 변호사로 남부에서 유명했던 조지아 출신의 Thomas R.R. Cobb은 지휘관으로 첫번째 참전했다가, 길 건너 작은 기념비가 세워진 곳에서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다. 여기 프레더릭스버그가 그의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했기 때문에, 1880년대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려서 최초로 저 작은 기념물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총 대신에 수통을 들고 물을 먹여주는 모습의 이 동상은 참 의외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남군으로 당시 19세였던 Richard Kirkland는 북군이 후퇴한 후에, 돌담 너머에 버려진 적군 부상병들에게 물을 나눠 줘서 "메리 언덕의 천사(The Angel of Marye's Heights)"로 불렸단다. 하지만 천사도 총알을 피할 수는 없었는지, 이듬해 다른 전투에서 역시 전사했단다. 참, 커크랜드 모자 위에 앉아있는 것은 조각이 아니라 진짜 새다~^^

약간의 오르막을 걸어서 남군 총사령관인 Lee 장군이 방어선을 내려다 보던 언덕에 올라왔다. (작게 보이는 하얀 집이 좀 전의 이니스 하우스) 옛날 전투에서는 역시 높은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게티스버그 2편에서 뮤직비디오까지 보여드리면서 설명한 적이 있다.

전쟁 공원에서 빠질 수 없는 대포들이 언덕 아래를 향하고 있고, 그 뒤쪽으로 성조기가 세워져 있는 곳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865년에 처음 만들어진 프레더릭스버그 국립묘지(Fredericksburg National Cemetery)이다.

이 부근에서 전사한 북군 병사 약 15,000명의 유해가 여기 잠들어 있는데, 이름이 새겨진 비석보다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서 숫자만 적힌 작은 표석을 박아둔 곳이 훨씬 더 많다. (남군 병사는 별도의 장소에 마련된 공동 묘지에 매장했다고 함)

국립묘지의 중앙에는 펜실베이니아 출신으로 북군의 공격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지휘관인 Andrew A. Humphreys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7명의 부관들 중 5명이 전사하고, 그도 2번이나 말에서 떨어져서도 다시 싸우는 투혼을 보였기에, 비록 그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여기 묻히지는 않았지만, 전후에 당시 부하들이 이 곳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작년의 1박2일 남쪽 여행에서 방문했던 포트먼로(Fort Monroe) 준국립공원에서도 이렇게 포탄을 예쁘게 쌓아놓아서 아내가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그 옛날에 이 커다란 쇳덩어리 안에 화약을 넣어 적진으로 날려서 터지게 했다는게 갑자기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비지터센터로 바로 이어지는 쪽에 만들어진 국립묘지 정문 옆에 서있는 추모비를 잠깐 올려다보고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오래간만에 다시 남북전쟁에 대해 공부해보니 다른 전쟁터의 스토리들도 궁금해졌는데, 그렇다고 이 하나의 국립군사공원에 속한 다른 장소들을 찾아가볼 것 같지는 않고, 집에서 북쪽에 위치한 별도의 '국립 공원'으로 지정된 두 곳을 언제 찾아가 NPS Official Units 방문리스트에 올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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