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위한 유일한 국립 공원인 울프트랩(Wolf Trap) 야외극장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음악 감상

버지니아 페어팩스 카운티의 비엔나(Vienna)라는 작은 마을에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공연예술을 위해 만들어진 국립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울프트랩 국립공연장(Wolf Trap National Park for the Performing Arts)이 있다. 공원 부지는 18세기말부터 페어팩스(Fairfax) 집안을 시작으로 부유한 가문들의 농장으로 수 백년간 보존되다가, 마지막 개인 소유주였던 Catherine Filene Shouse가 1966년에 정부에 땅과 함께 공연장 건설비 2백만불을 기증하면서, 미의회 입법을 거쳐 Wolf Trap Farm Park가 만들어졌고, 나중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무더운 7월의 토요일 오후, 피크닉 음식을 바리바리 싸온 사람들이 공연시작 2시간 전부터 입장을 위해 줄을 서있고, 국립공원청 직원이 카트로 손님을 우리 뒤쪽 멀리 대기줄의 끝으로 태워주고 있다. 가운데 멀리 보이는 필렌센터(Filene Center)의 입구와 야외극장의 모습은, 여기를 클릭해서 이 날 입장권을 사기 위해 두 달 전에 매표소에 들렀을 때 찍은 사진들을 보시면 된다.

1시간반 전부터 입장 시작이 되기 직전에 레인저가 보안검색 등의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계신데, 나중에 나눠준 팜플렛에 얼굴 사진과 환영사가 있는 이 국립 공원에서 가장 높으신 감독관(superintendent)이었다. (구글맵으로 공원의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커다란 칠판에 오늘의 공연 제목인 Joe Hisaishi Symphonic Concert : Music from the Studio Ghibli Films of Hayao Miyazaki 글씨가 예쁘게 씌여있고, 왼쪽에는 우산을 쓴 토토로 그리고 오른쪽에는... "저 까만 고양이는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나왔나?"

정문 앞의 하얀 천막에서 보안검색을 통과해야 하는데, 홈페이지에는 아이스박스 크기 제한도 있고 아주 꼼꼼하게 검사한다고 겁을 주지만, 그냥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바로 통과를 시키고 아주 소수만 선별적으로 검사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줄이 쭉쭉 빨리 빠지는 바람에 왼편의 레인저 스테이션에서 까만 공원 브로셔를 받는 것을 깜박했다~

우리가 예약한 표는 잔디밭(lawn)이라 따로 정해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입구를 통과하면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서 바로 달리는 '론러시(lawn rush)' 전통이 있는데, 사진 가운데에 재빨리 뛰어가서 벌써 돗자리를 펴고 있는 아내와 친구분이 보인다.^^

정말 오래간만에 해보는 잔디밭 피크닉으로, 친구분 따님이 만들어 준 샌드위치를 우아하게 유리잔 와인과 함께 즐겼다. 여기서 LA의 유명한 헐리우드보울(Hollywood Bowl)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주차장과 야외극장 주변으로 엄청나게 많은 피크닉 테이블이 있고 또 제일 앞자리에도 식사를 위한 테이블까지 구비된 박스석이 있는 LA와는 달리 (옛날 포스팅의 사진들을 보시려면 클릭), 여기는 밖에 테이블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그냥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하며, 지붕이 있는 앞쪽 좌석에서는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공연전 10분쯤에 자리에서 일어나 한바퀴 돌며 찍은 영상을 보시면 시끌벅적한 당시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다. 약 7천석 규모의 필렌센터 야외극장은 1971년에 개관을 했다가 1982년에 원인불명의 화재로 전소되어서, 약 2천만불을 들여 1984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개장을 했다고 하며, 울프트랩에는 이 대극장 이외에도 두 개의 작은 야외 무대와, 10월부터 5월초까지 운영되는 약 400석 규모의 실내 소극장도 갖추고 있다.

와인잔에 입가심으로 맥주를 부어서 셀카도 한 장 찍고, 피크닉은 정리하고 공연을 볼 준비를 했다. 국립 공원이지만 공연장의 운영은 비영리 재단인 울프트랩 파운데이션(Wolf Trap Foundation)에서 담당하는데, 링크한 홈페이지에서 5월말부터 9월초까지 진행되는 야외공연의 스케쥴 등을 확인하고 예매를 하실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 애니메이션 영화 대부분의 음악을 작곡한 히사이시 조(Hisaishi Joe)가 워싱턴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National Symphony Orchestra)와 그의 교향악단이 연합한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첫번째 곡은 그가 1984년에 처음으로 음악감독을 맡았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Nausicaä of the Valley of the Wind 중의 5곡을 메들리로 들려줬다.

다음 <마녀 배달부 키키> Kiki's Delivery Service 후에 1997년작으로 서방 국가에 미야자키 이름을 알린 '원령공주' <모노노케 히메> Princess Mononoke 주제가는 일본인 소프라노 가수가 나와서 불렀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 소년의 꿈을 서서히 망가뜨려가는 내용이라는 <바람이 분다> The Wind Rises 편에서는 사진 앞줄 왼쪽의 만돌린(mandolin) 연주자가 특별 협연을 했고, 가운데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이 히사이시 지휘자다. 이 다음에는 바다가 배경인 <벼랑 위의 포뇨> Ponyo on the Cliff by the Sea 곡들로 1부가 마무리되었다.

위기주부는 계속 맥주를 홀짝이며 음악을 감상한 터라 박수 소리와 함께 급히 화장실로 향했는데, 나오면서 보니까 역시 엄청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제 해가 져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문제는 멀리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

2부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때는 비가 제법 내려서 이렇게 잔디밭은 모두 준비해 온 우산들로 덮였다. 그러고 보니 LA에서는 헐리우드보울 공연을 보러갈 때, 비가 올 걱정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ㅎㅎ 여기는 공연 중에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뒷자리의 환불은 안 되고, 앞쪽 지붕이 있는 좌석의 1층과 2층에 빈 자리나 통로로 이동이 가능하다고만 되어 있었다. 다행히 이 때까지는 모자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라서 남편들은 그냥 비를 맞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천공의 성 라퓨타> Castle in the Sky 음악을 감상했다.

 

'중년 아재의 로망을 깨우는' 위기주부의 최애작인 <붉은 돼지> Porco Rosso 영화는 "Bygone Days" 한 곡만 연주하길래 영상으로 찍어봤다. (아내가 앞쪽에서 찍은게 스크린의 영화 장면은 더 잘 나왔지만, 그냥 전체 공연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이게 더 좋음) 특히 곡의 뒷부분에 클라리넷 재즈가 나와서, 우리 부부는 뉴욕에 있는 딸이 떠올랐고, 나중에 카톡으로 찍은 영상도 보내줬다. 참, 이 공연은 플래쉬만 터트리지 않으면 공연중 사진이나 영상 촬영에 아무 제약이 없었다.

다음 <하울의 움직이는 성> Howl's Moving Castle 후에 2001년작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으며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의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Spirited Away 음악을 들려주는데, 무대에서 빨간 기모노를 입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지휘자의 딸로 어릴 때부터 몇몇 애니메이션에서 녹음을 했었단다.

연주회의 마지막 영화인 <이웃집 토토로> My Neighbor Totoro 연주가 시작될 때부터는 결국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거의 아무도 불평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이 빗줄기가 무더운 열기를 식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잔디밭에 앉은 관객들에게는 공연 전체에서 가장 큰 즐거움(?)과 웃음을 안겨줬는데...

만화영화 '토토로'를 전혀 모르시는 분이라도 어디서 한 번은 분명히 봤을, 영화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이 장면! 나무위키의 설명을 그대로 가져오면 "장마철이 시작되는 7월의 어느 날, 비가 몹시 쏟아지던 날, 우산을 들고 정류장으로 아빠를 마중나가 기다리다가 사츠키도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라고 되어있다.

 

번개와 함께 강한 비가 내리는 야외극장에서 우산을 쓰고 '토토로' 주제가를 들으며 바라보는 스크린에, 바로 그 만화 속의 비 내리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일본의 존 윌리엄스'라 불린다는 조 히사이시(Joe Hisaishi)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음악회는 폭우와 박수갈채 속에 끝이 났는데, 공연장 이름이 울프트랩(Wolf Trap)이라서 그런지 뒤쪽의 젊은 남자들이 늑대 울음소리로 환호를 했던 것 같다.

한참을 기다려도 인사만 계속 하길래, 다 끝났다 생각하고 짐을 정리해서 일어나니까, 그제서야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앵콜곡을 연주해서 잠시 서서 구경했다. 당시에는 무슨 곡인지 몰랐는데, 찾아보니까 <붉은 돼지>의 "Madness"라는 멋진 곡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피크닉이 주목적이라 생각하고 나와서, 비까지 맞으며 잔디밭에서 본 공연도 너무 만족스러웠고, 이로써 위기주부가 지금까지 방문해서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긴 미국의 '넓은 의미의 국립 공원' 갯수도 정확히 120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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