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여행기

미국 역사상 하루만에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장소인 앤티텀 국립전쟁터(Antietam National Battlefield)

위기주부 2023. 9. 2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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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은 미국인들끼리 싸웠던거라서, 양측의 사상자를 합쳐서 계산하는 것이 정확한 비교가 아닐 수도 있지만, 1862년 9월 17일 동틀녘부터 해질 때까지 단 하루 동안 벌어졌던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에서, 남북 총계로 3675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만2700명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단다. 이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군 전사자인 2334명이나, 심지어 9·11 테러의 희생자 3000명보다도 많은 사람이 하루만에 죽은 것이다. (자연재해로는 1900년 갤버스턴 허리케인 참사로 약 8000명이 죽고, 2020년말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하루 5000명 이상이 사망한 날들이 있음)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가 있는 공원에서 등산을 마치고, 메릴랜드 주의 조용한 시골 마을인 샤프스버그(Sharpsburg)에 있는 앤티텀 국립전쟁터(Antietam National Battlefield)를 토요일 점심 무렵에 찾아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 아래로 나지막히 잘 자리를 잡고 있는 비지터센터로 들어간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국립 공원은 별도의 정해진 입구나 게이트는 없지만, 차량 한 대당 입장료 $20을 자율적으로 여기서 내는 식으로 운영된다. 위기주부는 작년 8월에 구입했던 12번째 연간회원권을 여기서 마지막으로 사용했는데, 13번째는 또 언제 어디서 구입하게 될 지가 궁금하다~^^

반지하의 전시실로 내려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America's Bloodiest Day"라는 말과 함께 작은 병사 모양에 불이 들어오는 전광판으로 형상 하나가 50명의 사상자를 나타낸다고 되어 있다. 사람들에 의해 가려진 곳에 시간 순으로 5번의 교전에 해당하는 버튼이 있어서, 각각의 버튼을 누르면 그 때의 사상자 수 만큼 불이 꺼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왼편에 이 때까지의 전쟁의 흐름과 오른편에 남북의 총사령관 사진 등이 보이지만, 대부분은 거의 관심이 없으시니 설명은 생략하고... 궁금하신 분은 본문 제일 위의 링크를 클릭해서 나무위키에 요약된 내용을 직접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 윗층에는 3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실내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지만, 어느 방향으로나 보이는 것은 숲과 옥수수밭들 뿐이었다. 안내영화의 길이가 무려 27분이라고 해서 볼까말까 망설였는데, 저 옥수수밭에서 전투가 벌어져서 군인들이 허무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보여주므로 역시 꼭 보시기를 바란다.

포토맥 강을 건너 처음 메릴랜드로 북진한 남군이 주둔하고 있던 샤프스버그 마을을 북군이 포위 공격을 한 전투라서, 위의 지도와 같이 자동차로 주요 격전지들을 둘러볼 수 있는데, 시간이 없으면 사실 비지터센터 주변만 둘러봐도 될 듯하다.

안내영화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냥 눈에 띄는 커다란 추모 기념물만 4개 이상이 보였다. 하나하나 어느 주에서 만들어 세웠는지 돌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왼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쪽만 잠깐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공원 브로셔 표지에도 등장하는 안내판의 흑백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사진 속 하얀 건물인 덩커 교회(Dunker Church)가 왼쪽 언덕에 그대로 남아있다. 전투가 하루만에 끝나서 남군이 퇴각한데다 워싱턴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직후에 사진사들이 이 곳을 방문해서 전혀 수습되지 않은 시신들의 이런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한다.

차를 몰고 ②번 위치를 찾아온 이유는 적십자 표식이 그려진 이 기념석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동판에는 지난 봄에 그녀의 집이자 적십자 본부로 사용된 국립사적지를 방문한 적이 있는 클라라 바튼(Clara Barton)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녀는 전투가 벌어진 날 구호품을 들고 여기 도착해서 부상병 치료를 도왔단다.

이런 옥수수밭 사이로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쏘고 칼로 찌르며 싸웠을 병사들이 참 불쌍하게 생각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도로 옆으로 세워진 멀리 보이는 추모 동상 등은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전투 당시에 불탔던 Samuel Mumma의 농장과 그 옆의 묘지에 잠시 차를 세웠다. 전쟁터 대부분이 그 당시나 지금이나 계속 옥수수밭으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는게... 시간이 그 참혹했던 160여년 전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⑧번 Sunken Road (Bloody Lane) 위치에는 전망탑이 세워져 있었다. 바로 옆에 만들어진 기념물은 '아일랜드 연대(Irish Brigade)'라고만 앞쪽에 적혀 있는데,

아주 리얼했던 청동 부조의 조각을 한참 바라보다가 전망탑의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불어 시원했던 타워의 꼭대기에서 행복한 커플이 사진을 부탁해서 찍고는 있지만...

약 2200명의 남군이 아래에 보이는 것처럼 나무를 지그재그로 쌓은 목책을 엄폐물로, 오른편에서 계속해 밀려오는 도합 1만명의 북군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장소라고 한다. 결국 방어선이 뚫려서 남군이 후퇴를 했지만, 북군이 더 전진하고 싶어도 앞쪽에 양측의 시체와 부상자들이 너무 많이 쌓여 '피의 통로(Bloody Lane)'를 만들고 있어서 진군하는 것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단다.

다음 전투 장소로 들린 곳은 ⑨번 Burnside Bridge인데,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여기도 전투 상황 등을 설명해주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혹시 한국어 가능한 발런티어는 필요 없으신가요? 당연히 없으시겠죠...ㅎㅎ"

포토맥 강의 지류인 앤티텀 개울(Antietam Creek)에 놓여진 아름다운 이 돌다리는 1836년에 만들어져서 그냥 '아랫다리(Lower Bridge)'로 불렸다. 남군의 총사령관인 리(Lee) 장군이 주둔한 샤프스버그 마을로 바로 통하는 이 다리를 조지아 주의 부대 500명이 사수를 했는데, 2차례에 걸친 북군 1만4천명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북군의 번사이드(Burnside)가 이끈 3번째 공격에서 함락되어서 지금은 '탄쪽의 다리(Burnside's Bridge)'라 부른단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⑪번 Antietam National Cemetery로 전투 5년 후에 만들어진 국립묘지로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북군 약 4천여명과 함께 그 이후 한국전쟁 전사자까지 이 지역 출신 미군들이 묻혀있다. 정리해보면 앤티텀 전투는 남군 45,000명과 북군 87,000명이 단 하루에 맞붙어 싸워서, 양측 합계 23,000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사실상 승패가 없는 싸움이었다. 다음날 버지니아로 물러나는 남군을 수적 우위인 북군이 추격해서 궤멸할 수 있었지만, 매클레런(McClellan)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두 달 후에 그 책임을 물어 북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된다.

묘지 중앙에는 높이 약 14 m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유명한 장군이 아닌 일반 병사들을 기리는 이등병 기념물(Private Soldier Monument)이다. 비록 앤티텀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무승부라고 했지만, 리(Lee)가 이끄는 남군의 주력부대를 후퇴시킨 자신감을 바탕으로, 불과 5일후인 9월 22일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이 남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외교적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북군의 전략적인 승리이자 남북전쟁 중반기의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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