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여행기/캐피탈이스트

19세기에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사람이라는 노예해방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위기주부 2023. 12. 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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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부 버지니아로 이사와서 두 달도 되지 않았던 2021년 12월말에, 많은 미국 위인들 동상이 만들어져 있는 내셔널하버(National Harbor)의 야외 공원에서 링컨 옆에 서있는 그를 처음 봤었다. 그 후 차례로 방문했던 웨스트버지니아 하퍼스페리(Harpers Ferry)와 메사추세츠 뉴베드포드(New Bedford) 국립역사공원에서 그의 이름을 마주쳤고, 올해 봄에 들렀던 아나폴리스(Annapolis)의 메릴랜드 주청사에서 최근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다시 만났었다. 흔히 제목처럼 "the most photographed person of the 19th century"로 알려져 있기도 한 그는, 웅변가이자 저술가로 노예해방론자로 활동한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이다.

워싱턴DC 남쪽의 아나코스티아 지역에 있어서 국립수도공원-동부(National Capital Parks-East) 그룹에 속하고, 1988년에 공식 지정된 국립 공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국립사적지(Frederick Douglass National Historic Site)를 찾아왔다.

한쪽 언덕을 깍아서 넓은 주차장을 만들고, 바로 연결되는 비지터센터는 이렇게 땅속에 만들어서, 주변 경관을 헤치지 않도록 노력을 한 흔적이 엿보였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벽면과 천장의 거친 질감이 그의 힘들었던 어릴적 시절을 떠올리게 하려는 듯하다. 그는 1818년에 메릴랜드 시골에서 흑백 혼혈의 노예로 태어났는데, 출산 직후 엄마가 다른 곳으로 팔려가 백인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단다. 그 자신도 불과 8살에 혼자 볼티모어 가정집에 팔렸는데, 그 집의 백인 여성이 그에게 읽는 법을 잠깐 가르친 것이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위기주부가 3번째로 만나는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동상으로 앞서 2개에 비해서 가장 나이 든 모습을 묘사했는지, 흑인 특유의 아프로(Afro) 헤어스타일, 소위 '폭탄머리'가 힘이 빠져서 마치 단발처럼 보이는데, 이 포스팅 맨 마지막의 사진을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실거다~^^

레인저가 딱 맞춰 안내영화 <Fighter for Freedom>을 틀어줬는데, 8세때 글을 배우는 모습부터 1895년에 77세의 나이로 이제 방문하는 그의 집 현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할 때까지의 일생을 배우들이 잘 보여주었다. 앞에 계신 분도 혼자 오셨던데 무료 투어에 참가하지 않는 바람에, 영화가 마치고 진행된 가이드투어는 위기주부 단 1명만을 위한 단독 투어였다! ㅎㅎ

언덕 위로 올라오면 1877년에 그가 지금의 워싱턴DC 경찰서장에 해당하는 U.S. Marshal of the District of Columbia에 취임하면서 구입한 저택이 나오는데, 미국에서 상원의 인준이 필요한 연방정부 고위직에 흑인이 임명된 최초의 사례이다. 그는 청소년기에 플랜테이션에서 채찍을 맞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몰래 독학으로 많은 책을 읽었고, 다시 볼티모어의 조선소로 보내진 후에 자유흑인이었던 Anna Murray의 도움으로, 20세때 가짜 신분증으로 뉴욕행 기차를 타고 탈출 후 결혼해서 함께 메사추세츠 뉴베드포드로 도망가게 된다.

그가 시더힐(Cedar Hill)로 불렀다는 저택의 정면 사진을 찍고 다가가니, 현관문을 열고 파크레인저와 투어를 담당하는 자원봉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젊은 남녀 두 명이 옆길로 다가오길래 다른 참가자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들은 투어를 따라다니며 이 곳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 국립공원청 인턴들이었다. 즉, 직원 4명에 손님 1명...! 파크레인저는 비지터센터로 내려가고, 보조 2명을 대동한 가이드가 위기주부만을 위해 설명을 해주는 '황제투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현관 오른편의 응접실(parlor)로 이 집의 가구와 소품들은 대부분이 더글러스가 살던 19세기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이렇게 잘 유지가 될 수 있었던데는 44년간 해로한 Anna가 병으로 죽고, 2년후에 재혼한 두번째 부인 Helen Pitts가 그의 사후에 기념재단을 만들어 집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그녀는 더글러스의 일을 돕던 20살 연하의 백인 여성이라서, 둘의 결혼은 양가에서 모두 심한 반대에 부딪혔었단다.

자신이 노예였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직접 만들어 달았다는 커텐 고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1841년부터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노예제폐지(abolition) 운동의 연사로 활동을 시작해서 1845년에 자신이 경험한 노예의 삶을 서술한 책을 내면서 유명해진다. 하지만 당시 연방법에 따라서 도망친 노예인 범법자였기 때문에, 노예사냥꾼들을 피해서 유럽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 후 강연료 등을 모아서 자신의 법적인 소유자에게 돈을 지불한 후인 1847년에야 자유인 신분으로 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단다.

1층 안쪽에 위치한 그의 서재(library)로 많은 책과 링컨의 흑백사진이 눈에 띈다. 미국에 돌아온 후에 뉴욕 로체스터(Rochester)에 정착해서 신문을 발행하며 노예제폐지 운동을 계속하는데, 급진주의자 존 브라운(John Brown)과도 인연이 있어서 그가 1859년에 흑인 무장을 위해 하퍼스페리 무기고를 습격했다가 체포된 후에, 더글러스는 잠시 캐나다와 유럽으로 또 도피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북전쟁 발발 후에 백악관에서 링컨을 만나서 흑인 부대 창설을 주도했고, 실제로 그의 아들들도 모두 남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식당(dinning)에 걸린 그림과 사진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계신 자원봉사자 가이드님으로, 항상 저렇게 유일한 손님을 쳐다보며 설명을 해주셔서 사진 몇 장 찍는 것도 아주 힘들었다는...^^ 계속해서 부엌에 있는 오븐과 싱크대까지 모두 사연을 들은 후에야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내부 투어의 마지막 사진은 2층에 있는 그의 침실로, 1889년부터 2년간 주 아이티(Haiti) 공사를 지낸 기간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투어를 다 마치고 감사 인사를 한 후 집밖으로 나가 시간을 확인했더니 거의 1시간이 흘렀더라는~

뒤뜰에는 그가 '그라울러리(Growlery)'라 불렀다는 작은 돌집이 복원되어 있는데, 본채의 좋은 서재보다도 저 안에 혼자 틀어박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기분이 언짢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맘껏 '으르렁(growl)' 할 수 있는 개인실이나 아지트, 즉 피난처 또는 안식처의 의미로 그렇게 지었다는데, 혹시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서 도망가는 용도로 주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ㅎㅎ

경사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돌아가며 올려다본 시더힐 저택으로 원래 방이 14개였는데, 구입 후에 뒤쪽으로 건물을 이어붙여서 방이 모두 21개나 있단다. 60세에 이리로 이사올 당시에 5명의 자녀로부터 손주가 20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방이 필요했다고... 그럼 마지막으로 왜 포스팅의 제목과 같이, 그가 세계에서 가장 사진에 많이 찍힌 19세기 사람이라고 여겨질까?

위 포스터와 같이 그의 사진만 모아서 따로 전시회도 열고, 비지터센터 서점에서는 두꺼운 사진 해설집도 판매하고 있는데, 노예해방 운동을 시작한 1840년대부터 죽기 직전까지 50여년 동안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찍은 독사진이 160장이 넘는다고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길어야 8년 정도만 유명했던 반면에,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50년 이상 계속해 미국과 영국에서 뉴스가 되고 신문에 얼굴이 나왔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자면 틱톡이나 인스타를 주름잡은 인플루언서 또는 셀레브리티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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